해군 당포함 격침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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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1967년 1월 19일 대한민국 해군 한국함대[3] 제1전단 묵호경비부 소속 호위초계함인 당포함이[4] 한반도 동해안에서 조선인민군 육군 해안포의 포격을 받아 격침된 사건. 북한의 대남 도발사에 들어가는 사건으로 문제의 발단은 북방한계선이었다.
이 당포함의 이름이 PCE-56 당포함[5] 이었기 때문에 대한민국 해군 56함 침몰 사건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2. 사건 당일[편집]
1967년 1월 19일 어선들은 명태를 잡으러 북방 한계선을 넘었다.[6] 당포함이 어로 보호작전을 통해 저지하기 위해 NLL을 넘어 저지하려는 순간 북한 경비정 2척이 출현했다. 당포함은 북한 경비정이 어선을 납북해 가려는 것으로 파악하고 북쪽으로 전진했고 북한 경비정들은 퇴각했다.
13시 55분 북한 해안가 포진지에서 기습적으로 포격이 시작되었다. 122㎜ 해안포 10여 문이 일제히 사격하며 당포함을 피격하여 기관실을 시작으로 스크류, 기관포탑 등이 계속 피격당하며 당포함은 순식간에 전투능력을 상실했다. 당포함도 급히 대응사격을 했으나 당포함의 무장은 3인치(76.2㎜) 포 1문, 40㎜ 6문, 20㎜ 4문에 불과했으므로 화력면에서 상대가 되지 않았고 40㎜와 20㎜ 기관포는 인민군 포대에 도달하지도 못했으며 3인치 함포는 북한군의 포탄을 맞고 조기에 제압되고 말았다. 게다가 북한군 포들은 해안의 진지에 잘 은폐되어 있었으므로 20발을 발사한 3인치 함포탄도 별 타격을 주지 못했다.
뒤이어 작전 중이던 다른 해군 함정들이 달려오자 북한군의 포격은 멈췄지만 이미 당포함은 기동 불능 상태에 놓였다. 결국 함장은 퇴함명령을 내렸으며 14시 30분경 당포함은 침몰하고 말았다.
1월 20일 오전까지 이 당포함에 타고 있던 해군 장병 79명 중 51명이 구조되었으나 그 중 11명은 사망했고 11명은 중화상, 28명은 시신조차 찾지 못했다. 침몰 장소는 NLL 근처였고 인양은 210m의 수심 때문에 하지 못했다.
3. 사건 이후[편집]
북한 측의 치밀하게 준비된 도발로서 비록 한국 측이 NLL을 먼저 넘긴 했지만 북한 측의 책임이 크다. 1999년 이후 제1연평해전, 제2연평해전이나 대청해전 모두 북한 측이 넘어왔어도 한국 해군은 처음부터 조준 사격을 가하기는 커녕 사전 경고를 먼저 보냈고 북한은 오히려 포탄으로 대답했다.
이 사건으로 당시 어로 작업에 참가했던 어민 중 몇 명이 해군에 미안하다며 자살하는 일도 있었다. 1월 20일 양측이 이 사건에 대한 공동 조사를 진행하겠다고 하였으나 이튿날인 1월 21일 북한은 군사정전위원회 본회의에서 중립국휴전감시위원단의 사건 조사를 거부하겠다고 밝히면서 무산되었다.
침몰한 당포함을 대신할 함정으로 PCE-50함이 인수되어 거진함으로 명명하였다. 당연히 이름의 유래는 이 당포함이 침몰된 거진읍에서 따 온 것이다.
당시 한국 정부의 대응이 도마 위에 올랐다. 당시 대학생들을 북한과 내통하는 빨갱이로 몰아서 수많은 탄압을 자행했지만 정작 진짜 북한이 쳐들어왔을 때는 해군 또는 수많은 어민이 북한의 도발에 의해 희생됐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야당의 비판에 올랐다.
심지어 피해국인 한국도 아니고 중립국휴전감시위원단인 유엔이 먼저 1월 20일 판문점에서 열린 군사정전위원회 비서장회의에서 공동 조사를 제의하고 엄중 항의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비판받았다.
결국 이 사건 이후 비판을 받자 정부는 어로보호 업무를 대한민국 해군에서 농림부와 내무부로 이관했고 1968년 동해안 2개 지역에 제트기의 운용이 가능한 공항을 신설하겠다고 발표하였지만 무산되었는데 강릉공항과 속초공항 등으로 대처가 가능하다는 얘기가 나왔기 때문이다. 제트기 운용이 가능한 공항은 동해안이 아닌 원주공항으로 바뀌었다. 민항을 소수 취급하는 원주공항을 제외하고는 강릉, 속초 둘 다 군용공항이다.
이후 해군 제1함대사령부 주관으로 당포함 전몰장병 추모식을 매 주기 거행하고 있다.
3.1. 그 외 도발 사건[편집]
이 사건이 터진 지 5개월 뒤인 6월 19일 북한은 또 다시 남한의 어선 2척을 기관총으로 위협하여 납북을 시도하였고 그 중 한풍호는 끌려가던 중 침몰하였는데 이 때 다른 배에 옮겨타 들어왔으나 1명은 행방불명되었고 나머지 2명은 총상을 입었다고 한다.
9월 20일 북한측 해안에서 9척의 남한 어선에 30분간에 걸쳐 250발의 포탄을 발사해 어선 1척이 침몰하고 1명이 중상을 입었다. 그런데 9척의 남한 어선을 향해 무려 250발의 포탄을 발사했는데도 군함도 아니고 어선 1척이 침몰했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 많다. 나중에 탈북자들에게 알려진 것에 의하면, 250발을 발사해서 1척을 침몰시킨 것도 실로 대단한 성과였다고 한다. 함도 아니고 어선. 그것도 250발 쏴서 어선 1척 침몰시켰다는 것부터 이미 정상적인 군대가 아니다. 북한의 군대 사정이 얼마나 답이 없는지 보여준 것이다.
12월 21일 또 북한 조선인민군 함정이 250여 척의 남한 어선들을 포위하여 납북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자 어선 1척을 들이받아 침몰시킨 뒤 달아났다고 한다. 이 사고로 침몰된 어선에 타고 있던 선원 6명이 사망했다.
1968년 1월 11일에는 북한 조선인민군 함정이 동해 어로 저지선 부근과 봉수리 근처 해안에서 조업을 하던 어선을 위협해 어선 1척을 침몰시키고 어선 3척과 20명을 납북하였다.
4. 기타[편집]
- 일부 언론 등에서 "당진호"라고 잘못 표기해 잘못 아는 사람들이 많다.
- 권주혁 작가가 쓴 바다여, 그 말 하라!의 2부에서 이 사건을 다루고 있다.
- 위키백과에서는 '대한민국 해군 56함 침몰 사건'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 당시 갑판사관으로 참전하여 생존한 사람의 증언이다. #
- 주성하 기자의 언급에 따르면 당시 북한 측 해안포대 중대장은 비록 공화국영웅이 되었지만 정작 10년 넘게 진급도 못 하고 중대장으로 머물러 있었다고 하는데 코앞의 배를 격침시키는 데 포탄을 무려 180여 발이나 썼기 때문이다. 그나마 격침시키지 못했다면 오히려 기강 해이로 문책감이었다.
- 거진항 뒷산인 종합운동장 방향으로 올라가보면 이 사건의 위령비가 설치되어 있다. 관할 해군 1함대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매년 추모행사가 거행된다.
5.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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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PCE-842급 경비정[2] 탑승 인원 79명[3] 실제로 있었던 명칭이다.[4] 미군이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건조한 PCE-842급 경비정을 1961년 12월 13일 인수하여 대간첩침투작전과 어로 보호작전에 경비함으로 투입했다. 초계함 기준의 차이로 정(Craft)에서 함으로 분류가 격상된 사례다.[5] 당시에는 당포호로 알려졌었다.[6] 명태가 남쪽보다 북쪽에 많기 때문이다. 먹고 살기 힘든 시대 탓에 납북을 각오하고 NLL 이북으로 조업을 나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7] 여수 반잠수정 격침사건, 제1연평해전, 제2연평해전, 대청해전 등은 모두 대한민국 해군의 승리로 종료되었다. 북한 측의 일방적인 기습이었던 천안함 피격 사건은 천안함측의 반격 등 양측간의 교전 행위가 없었고 따라서 교전의 조건을 충족하지 않는다.